안중근: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 유튜브 동영상 !!!

샬롬 6 2,184 2013.12.28 06:55
안중근: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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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13.12.28 07:02
<font Color=Red><font Size=2><B>
안중근의사는 1879년 7월 16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31세의 나이로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으로 생을 마감하신 우리의 자랑스런 영웅이자 애국자이자, 당시 대한독립군의 중장의 신분이었다. 1909년 10</SPAN>월<SPAN>26</SPAN>일 하얼빈역에 아침<SPAN> 9</SPAN>시 도착<SPAN>, </SPAN>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예정의 날 아침에<SPAN>, </SPAN>불과<SPAN> 5m</SPAN>의 거리에서<SPAN> 6</SPAN>발의 권총사격으로 이토히로부미<SPAN>(</SPAN>伊藤博文<SPAN>)</SPAN>을 암살했다<SPAN>. </SPAN>그가<SPAN> 6</SPAN>차례의 재판을 받는 중에<SPAN>, </SPAN>왜 그를 암살했나는 질문에<SPAN> 15</SPAN>가지의 이유를 명쾌히 설명<SPAN>, </SPAN>당시 검찰관이나 형무소 헌병도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던 사실이 동영상에 여실히 나온다<SPAN>. </SPAN></SPAN></STRONG></FONT></P>
<P style="MARGIN: 0cm 0cm 0pt"><FONT color=#003A9D><STRONG><SPAN style="FONT-FAMILY: 돋움; FONT-SIZE: 12pt; mso-bidi-font-family: 굴림">동양평화론은<SPAN>, </SPAN>그 당시 아무도 생각치못한 명쾌한 새로운 세계지도를 그리고 있었다<SPAN>. </SPAN>한중일<SPAN> 3</SPAN>개국이 경제통합하고<SPAN>, </SPAN>통화도 단일통화를 체택하면 더욱 번성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SPAN>. </SPAN>동영상의 하부에서는 일본의 학자도<SPAN>, 1910</SPAN>년<SPAN>8</SPAN>월<SPAN>22</SPAN>일의 한일합방은 지나친 것이었다고 시인한다<SPAN>. </SPAN>이등박문이 하얼빈에 간 것은<SPAN>, </SPAN>한일합방과 만주이권을 러시아와 담판하기 위해서였다고도 밝히고 있다
샬롬 2013.12.28 07:12
<font Color=Red><Font size=2><B><萬人必見>日本朝日 TV방송 제작 [안중근]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해룡) !!!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지금으로부터 약 173 년전에 태어난 이또 히로부미.</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당시의 시대상은 이미 동북 아시아의 대 변혁을 예고하고 있었다.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특히 일본에 있어서는 이또 히로부미가 12살즈음에&nbsp;미국의 흑선 페리호가 통상을 하자는 조건을 내걸고 일본 해안에 정박해 대포로 위협을 하고 있었고 17살 즈음은 결국 미일 통상 조약이 체결 되었던 것이다.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그러나 미국은 애타게 일본과의 통상과 밀월을 원했던 것도 아랑곶 없이 이또가 19살 되던해에 그러니까 통상 조약을 했던 약 3년 후 그만 철수를 하다싶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SPAN></STRONG></P>
<P><STRONG></STRONG>&nbsp;</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그 이유는 바로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남북전쟁 때문이었다.&nbs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2년 후 고종 황제 즉위)</SPAN></STRONG></P>
<P></SPAN></STRONG><STRONG><SPAN style="FONT-SIZE: 10pt">물론 그&nbsp;수혜는 북경에서 호시탐탐 일본을 엿보던 영국 함대의 차지가 되었고 이로부터 1918년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과 영국은 모든 분야에서의 밀월 관계가 시작 되어&nbsp;일본에는 방직 기계와 조선술이 먼저 전파 되고 이또 히로부미가 20세가 좀 넘어서는 제1차 영국 유학단이 형성 되어 그는 나이를 10대로 속여 조슈번의 대표로 합류를 하게 된다.&nbsp;&nbsp; </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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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STRONG><STRONG><SPAN style="FONT-SIZE: 10pt">혹자는 이또 히로부미가 영국에서 공부를 했고 다시 독일로 가 재차 공부를 하게 된다고 알고 있으나 그것은 전연 아니고 20여명이 좀 넘은 제1차 영국 유학생 중 18명은 영국 안착 약 8개월 후 자발적으로 급히 귀국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일본의 조슈번이 자기들의 해역에서 불란서 함선 몇척을 불태운 사건이 전 셰계로 보도 되었고 이에 경악한 젊은 유학생들은 불란서와 일본과의 전쟁을 예견하고 이에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귀국을 서둘렀던 것이 그런 해프닝을 낳았던 것이다.&nbsp; </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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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그후 이또 히로부미는 에도의 막부를 타도하는데 줄을 잘 섰는데다 자신의 오야붕이 일찍 투쟁에서 서거를 하는 통에 젊은 나이에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물론 외국과의 각종 조약 체결에 대한 많은 문건의 작성은 자신의 능력이 발휘되어 일본의 근대사에 길이 남게 되었던 것 또한 하나의 큰 공적으로 남아있다. </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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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더구나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을 대륙 진출의 발판을 삼고자 동학난을 기회로 삼았고 그로인해 청일 전쟁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nbsp; </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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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STRONG><STRONG><SPAN style="FONT-SIZE: 10pt">1894년에 벌어진 청일 전쟁.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당시 청나라는 이홍장이 북양 함대의 위용을 자랑했고 한편 대원군과 나이가 비슷한 그는 대원군을 붙잡아 4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에서의 귀양양살이를 시켰던 사람이다. </SPAN></STRONG><STRONG><SPAN style="FONT-SIZE: 10pt">(후일 중국의 군 통수권을 모두 가졌던 원세계는 고종황제와 나이가 비슷하다)</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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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그러나 청일 전쟁의 결과는 중국으로써는 매우 비참했다.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조선&nbsp;서해 해전에서의 대패.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에서의 참패는 종이 호랑이라는 것을 여실히 나타냈고 그로인한 시모노새끼 조약은 청국의 비참함을 맛보게 했다. </SPAN></STRONG></P>
<P><STRONG></STRONG>&nbsp;</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먼저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일본은 이홍장을 시모노새끼로 오라는 통보를 했고 이에 이홍장은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홍장이 막상&nbsp;통보를 받은 날 시모노새끼의&nbsp;&nbsp;정해진 장소에는 싸늘한 가운데 청소부만 나타나 누군데 어떻게 왔느냐는 질문만 던졌다.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이상하게 느낀 이홍장의 일행은 조약 체결을 위해 왔노라는 말을 하자 그 청소부는 안면을 바꾸고는 날짜가 취소되고 뒤로 미루어 졌다는 통보를 받지 못했느냐는 핀잔을 되레했다.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이홍장은 기막힌 패장의 가슴 앓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는 다시 정해주는 날을 기약하고 청국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물론 일단 훈련을 시킨 이홍장에게 일본이 차후 요구한 청일 전쟁의 배상 조건은 너무나 가혹할 정도였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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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일본과 청국과 러시아의 한반도를 두고 벌렸던 각축전.</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일본은 일단 청국을 제꼈고 결국은 11년 후 나머지 장애물이었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까지도 승리를 하게 되어 노일 전쟁이 끝난 1904년 이듬해 즉 1905년에는 바로 이또히로부미의 책략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 되었던 것이다.&nbsp;&nbsp;</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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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이 노일 전쟁 대목에서의 특징은 세계 최강이라던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우리의 서해 해상에서 일본 함대에게 전멸을 당했다는 것과 일본의 도고 제독이 이순신 장군을 들먹였던 대목이 주목을 끌었다.</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물론 당시의 여건은 발틱 함대가 석탄을 피워가며 장장 9개월에 걸친 항해로 해전의 목적지에 당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도 있었지마는 도고 제독이 이순신 장군의 학익 편대로 러시아 함대를 전멸시켰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진정한 실토였던 것이다.&nbsp; </SPAN></STRONG></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이 대목에서의 우스운 얘기는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 조정에서는 도대체 이순신이 누군지를 알아 보게 했다는 헤프닝이었다.&nbsp; </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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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얘기를 바꾸어 물론 일본으로써는 당시 요동과 만주의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던 러시아로 부터 철도권과 지배권을 모두 강제 이양을 받다싶이했고 그것은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nbsp; 크나큰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nbsp;&nbsp;&nbsp;</SPAN></STRON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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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이후 일본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의 총리 이또 히로부미의&nbsp;야심 즉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대륙으로 진출할 발판을 삼겠다는 침략의 근성이었고 이것은 아시아 국가 모두가 평화로 공존할 수 있다는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nbsp;&nbsp; </SPAN></STRONG></P>
<P><STRONG></STRONG>&nbsp;</P>
<P><STRONG><SPAN style="FONT-SIZE: 10pt">힘의 논리가 항상 앞섰던 인류의 역사. 엄연한 법을 따라 판단을 했더라면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법정이 아니라 러시아의 법정에 섰어야 했고 그의 사상은 오히려&nbsp;난세의 정의로움으로 전 세게로 전파되어야 했을&nbsp;가치였을 것으로 안다.&nbsp;&nbsp;</SPAN></STRONG></P>
<P><STRONG></STRONG>&nbsp;</P>
숙명사랑1 2013.12.28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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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사랑1 2013.12.28 07:28
<font Color=Red><font Size=2><B>[유튜브 동영상을 감상하실 때]는 -  맨 아래 [숙명사랑] : [작은 사각형]을 누르시면 일단 음악이 [ STOP ] 됩니다. 감사합니다.
숙명사랑1 2014.08.19 10:41
<font Color=Blue><font Size=2><B>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 <BR>
오늘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입니다.<BR>
아래는 사형선고 받은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쓴<BR>
조마리아 여사 편지 전문입니다.<BR><BR>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BR>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BR><BR>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BR>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BR><BR>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BR>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BR><BR>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BR>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BR><BR>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BR>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BR><BR>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BR>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BR><BR>

- 새벽편지 정리 -<BR><BR><BR>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BR>
사형당했을 당시 나이가 31세.<BR><BR>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께<BR>
천국에서 만나자는 가슴아린 답을 보냈습니다.
숙명사랑1 2014.08.19 11:08
<Center><EMBED height=400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600 src=http://cfile23.uf.tistory.com/media/167D1D514E00A0DF1B4026 scale="exactfit" allowfullscreen="true" allowNetworking='internal' allowScriptAccess='same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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